2023.07.15
오타쿠특) 힘든 사랑에 불타오름

https://youtu.be/auQxNYJ07Lc

 

 

지나가는 지상고 농구부 일곱(감독코치포함이다.)을 붙잡고 기상호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일곱이면 일곱, 모두 다 같은 대답을 할 거다.

 

기상호는 개씹노답오타쿠라고.

 

인정할 건 인정한다. 기상호는 오타쿠다. 근데 그게 뭐 어때서? 기상호는 그저 가끔 컨셉충 놀이를 하고 만화를 좀(많이) 보고 애니 보다가 눈물 쬐끔 흘리는 평범한 오타쿠였다. 물론 그 컨셉질 때문에 지상고 농구부가 좀 위험하다는 소문이 돌고 만화책에 과몰입해서 따라 하느라 노답 새끼 소리 듣고 눈물 흘린 거 대대손손 놀림 당할 예정이었지만, 잇츠오케이. 웨르웨르 기상호. 기상호는 그런 거에 기죽을 인간이 아니다. 이런 걸로 기죽을 거였으면 성준수한테 하루종일 욕으로 처맞았을 때 진즉 죽었겠지…

 

 

 

기상호의 오타쿠적 성향은 나름 농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힘숨찐 컨셉으로 상대 팀 혼란시키기(잘 안통했지만), 성장형 캐릭터 컨셉으로 슛 연습하기(잘 안늘었지만), 오타쿠 특징인 관찰력으로 상대 분석하기(이거는 좀 도움됐다). 나열한 세 개 중에 하나만 유의미한 결과를 냈지만 아무튼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다만 기상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열혈 스포츠만화 주인공인 줄로만 알았던 기상호가 난데없이 청춘 로맨스 주인공으로 각성해버린 것이다. 아니, 이왕이면 슈터의 능력을 각성해야 되는 거 아님? 레알임?

 

놀랍게도 레알이다. 기상호는… 오타쿠 생활로 다져온 관찰력을 이용해 처음으로 분석한 상대에게 사랑에 빠져버렸다. 다섯살 연상에 같은 남자인데다가 전혀 기상호를 그렇고 그런 감정으로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은 박병찬에게 말이다.

 

사랑에 빠진 이유가 뭐였더라. 사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그냥 하는 거지 사랑.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친절했고 잘생겼으며 농구를 잘했다. 좋은 거랑 좋은 거랑 좋은 것만 합쳤으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쪼렙일 때는 레벨업이 더 쉬운 법이다. 좋아함이 사랑함으로 업데이트 되기 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박병찬이 마냥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부상으로 자주 예민했고 어딘가 쎄한 부분이 있었다. 당장 경기가 끝나고 누굴 찾아서 죽여버리겠다는 박병찬을 기상호는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지 않았나. 근데 그것까지 좋았다. 이유는 하나다.

 

아무래도 오타쿠는… 갭모에에 심쿵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오타쿠특) 힘든 사랑에 불타오름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친절하다. 정확히는 친절해졌다. 처음에 같이 경기 뛸 때는 기상호도 박병찬의 약점을 공략하느라 바빴고, 박병찬은 경기 승패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승부에만 집중했다는 뜻이다. 경기 끝난 후에야 뭐… 다만 기상호는 그때부터 박병찬에 대한 호감을 차곡차곡 적립하고 있었다. 왜냐면 멋있잖아. 비운의 천재 같기도 하고. 아무튼 박병찬은 모르겠지만 기상호는 박병찬이 처음부터 좋았다. 

 

두 사람이 조금이나마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지상고와 조형고가 합동 훈련을 했을 때다. 물론 같이 훈련을 한 건 아니고 몰래 체육관에 온 병찬에게 일방적으로 기상호가 조언을 구한 거에 가깝다. 거의 초면인 상대에게 부탁할 일은 아니었으나 기상호는 성준수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기에 상대적으로 친절해 보이는 얼굴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박병찬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예상과는 다르게 어투도 조금 날카로웠고 목소리도 생각보다 차가웠다. 그런데도 박병찬은 기상호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해줬다. 난데없이 풀어놓는 넋두리도 다 들어주었고. 게다가 기상호가 재능이 없지 않다는 칭찬까지! 대화하면 할수록 호감이 생겼다. 어떻게 보면 그날이 시작이다. 기상호 청춘 로맨스물의 시작 말이다.

 

합동 훈련이 끝나기 전에 기상호는 박병찬의 번호를 땄다. 박병찬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번호를 찍었다.

 

“근데 너 내가 몇살인지는 알아?”

“어…. 몇살이세요?”

“너 진짜 웃기다.”

“감사합니다?”

 

기상호는 그날 박병찬이 자기보다 다섯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와, 성인이면 햄 술도 마셔요? 가끔? 우와… 햄 진짜 멋있네요. 멋있기는… 박병찬은 민망하다는 듯 웃었고 기상호는 그걸 보면서 박병찬이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이 햄 진짜 잘생겼네… 인기 많겠다. 박병찬은 실제로 인기가 많았다. 연락하다 보면 종종 고백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하다못해 같은 시커먼 사내놈들 사이에서도 추앙받기 일쑤였다. 게다가 기상호의 사랑까지 얻었지 않나.

 

 

 

십 육년이라는 남들에 비하면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기상호는 본인이 이성애자라고 믿고 있었다. 처음으로 몽정한 상대도 여자였고 자위를 할 때도 여자를 상상하면서 뺐다. 첫 키스도 물론 처음으로 사귄 여자친구였다. 기상호도 가만히 있으면 멀쩡한 얼굴이고 키도 또래보다 훌쩍 컸으니 연애를 한 적도 있었다. 금방 차이긴 했어도 아예 경험이 없지는 않다 이거다. 농구부 사람들은 기상호의 연애 썰을 들을 때마다 니가? 라며 기만했지만 어쨌든 사실인 걸 어쩌라고. 기상호는 이성애자였고 앞으로도 여자만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인기짱 박병찬에게 속절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이라뇨. 

 

처음엔 부정했다. 그다음엔 화가 났다. 기상호가 왜 박병찬을? 기상호 너 또라이야? 본인을 향한 분노였다. 그 뒤로 협상과 우울이 있었고 마지막으로는 수용했다. 이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똑같다고 하던데. 사랑은 어쩌면 죽음과 비슷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기상호가 죽음을, 아니, 사랑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기상호를 겉핥기로 아는 남들이 보기엔 기상호가 멍청하고 단순해서 금방 본인 마음을 인정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아니다. 기상호는 객관적으로 똑똑하고 예상외로 생각 회로가 복잡한 인간이다. 끝도 없이 검토를 했다. 이건 동경이 아닐까? 단순한 좋아해는 아닐까? 멋있어서 선망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질투일지도 몰라. 모두 맞았다. 기상호는 박병찬을 동경하고 좋아하고 선망하고 질투했다. 그 모든 걸 합친 결괏값이 사랑이었을 뿐이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사실만 깨달은 기상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일단 엉엉 울기였다. 야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기상호는 소리도 없이 냅다 울었다. 내가, 내가 게이였다니. 약간의 억울함과 조금의 충격이 담긴 눈물을 뚝뚝 흘려낸 기상호가 울음을 그친 뒤에 뭘 했냐면, 일단 할 일을 했다. 사랑을 하려면 일단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가능하지. 대회가 끝나지 않았고 기상호는 성준수와 진재유가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랐다. 다만 박병찬 생각이 슛 연습할 때마다 났다. 너는 에임이 구데기야. 하필 생각나는 게 막말이라 몹시 억울하긴 했다. 오늘 저 림에 백 번 넣으면 오늘 햄한테 연락한다. 자체 목표를 세우고 구데기라는 말을 뇌에서 재생한 기상호가 결국 연락을 했느냐면 거의 못 했다. 거의라는 단어에도 미안할 정도로 못 했다. 나중에 코너에서는 잘 넣는다는 걸 깨달은 뒤에야 기상호는 박병찬에게 당당하게 연락할 수 있었다.

 

 

 

준향대 합격 발표가 나는 날 기상호는 가볍게 멀미를 했다. 두 발이 모두 땅에 붙어있고 무언가에 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랬다. 일단 성준수의 합격 여부가 결정되는 날이었고 동시에 박병찬의 합격 여부가 나오는 날이었다. 커다란 농구부 모두가 모여서 조그만 노트북 하나에 타닥타닥 붙어 새로고침을 눌렀고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햄, 축하해요! 그렇게 지랄을 하더니 가는군요 전하! 준수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등등등…. 기상호도 무언가를 말하긴 했는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기상호의 정신은 이미 부산에 위치한 지상고가 아니라 저 멀리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찬햄은 붙었을라나, 햄이 떨어지면 어카지, 햄 붙었으면 내도 준향대 갈까. 끝없이 이어지는 기상호의 정신을 현실로 소환한 건 성준수의 처음 들어보는 들뜬 목소리였다

 

“야, 박병찬 형도 붙었다는데?”

“와, 진짜요?”

“그 햄 실력이면 당연 붙는 게 맞다 아이가.”

 

기상호의 핸드폰은 잠잠했다. 소란 사이에서 기상호는 결국 또 잉잉 울고 말았다. 성준수는 너 내가 합격한 게 그렇게 좋냐며 당황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기상호를 껴안고(지금 생각하면 소름 돋는다.) 달래주었다. 햄… 내는요…. 병찬햄이 내를 쥐꼬리만치도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서, 그게 서러워서 그래요. 진실은 묻고 기상호는 햄 축하해요오, 하고 크게 울었다. 기상호 우는 소리가 인천까지 닿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날 박병찬에게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고 다음날 기상호가 성준수에게 들었다며 축하한다는 말을 남겼다. 축하해줘서 고마워 상호야. 열 한자의 답장을 통해 기상호는 본인의 사랑이 완벽한 짝사랑임을 실감했다.

 

그러나 오타쿠는 힘든 사랑일수록 불타오르는 법이다.

 

 

 

성준수와 진재유가 졸업을 하고 기상호는 이학년이 되었다. 이 말인즉슨, 박병찬이 남대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대생. 이 얼마나 문란한 단어인지. 기상호는 매일 밤 저주를 내렸다. 병찬햄한테 남친이든 여친이든 뭐가 생기기라도 하면 나 살고 병찬햄 사는 거라는 저주였다. 기실 저주라기엔 매우 허접했으나 기상호 성정상 죽니 어쩌니 하는 거랑 맞지 않아서 그랬다. 죽을 정신으로 살아야죠. 딸랑 부원 여섯으로 전국대회를 나간 깡다구의 소유자다운 정신이었다.

 

박병찬은 대학 진학 후 재활을 시작했다. 농구 능력이야 뭐 흠잡을 곳 없고 피지컬도 이미 완성된 상태였으니 딱 하나 모자란 부분만 고치면 되니까. 사실 재활 소식도 알음알음 감독님을 통해 알았다. 와 박병차이 가 재활 들어간다데? 이야 그 햄은 이제 무적이네요, 무적. 니들도 무적으로 변신 쫌 해봐라. 그렇구나… 병찬햄 재활하는 구나. 잘 됐다. 기상호는 시큰해지는 눈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옆에 있던 김다은만 헐! 님 뭐하심! 하고 기겁했다. 갑자기 울면 이유를 말해야 되는데 병찬햄이 재활 시작한 게 넘 감격스럽다고 할 수는 없으니 시력을 포기한 거였다. 기상호 순발력 대박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했지만 남들한테는 기상호 저 또라이 또 뭔 짓을 하냐는 의심만 더해졌을 뿐이다.

 

 

 

 

일단 슛을 많이 던져보라는 박병찬과 그 외 인물들의 말에 따라 기상호는 성실하게 슛 연습을 했다. 넣을 때마다 병찬햄은 나를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한다 아 까비 왜 안 들어갔지 다시 싫어한다, 를 반복했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연습은 됐다. 기상호의 구데기 같은 에임도 이학년이 끝날 무렵엔 썩 봐줄 만 해졌다. 새로 들어온 신입생도 대단한 놈들이 들어와서 지상고는 어느새 예선 정도는 그냥 씹어 먹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해 지상고는 연맹 회장기에서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새삼 벅차오르는 기분에 기상호는 뽕에 취한 상태로 성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햄, 햄 저희 준우승 했어요!"

"봤어."

"저희 잘 했죠?"

"어. 근데 씨발 왜 나 있을 때는 그따구로."

"아아앙, 해앰."

"씨발 진짜 죽을래?"

 

성준수의 목소리에 점점 분노가 섞일 무렵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준수야 누구야? 박병찬의 목소리다.

 

"헉, 거기 병찬햄 있어요?"

"어. 술 마시는 중."

“우와…. 햄도 어른이구나.”

 

기상호의 목소리가 끊기자 성준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야 기상호 할 말 없으면 끊는다? 했다. 그런 성준수를 멈춘 건 박병찬이었다. 상호야? 네. 와 상호 오랜만이다. 뭐… 통화 함 하실래요? 그래도 돼? 네. 대화가 이어질 수록 기상호 심장 펌프질 속도가 배로 뛰었다. 와 이카다 심장 터지는 거 아인가. 다행히 기상호의 심장은 터지지 않았고 무사히 박병찬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햄, 잘 지냈어요?”

“으응, 상호 너도 잘 지냈지? 진짜 오랜만이다. 요새는 연락도 없고, 이제 형은 필요 없는 거야?”

“아이, 그게 아이고. 형 재활한다고 들어서… 방해될까 봐…”

“하루종일 하는 것도 아닌데 뭘. 섭섭하다 상호야.”

“그럼 맨날맨날 연락해도 돼요?”

“어어, 해해.”

 

아싸뵤. 오랜만에 듣는 박병찬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여유로웠고 온화했다. 아마 재활이 순조롭게 이어지는 듯했다. 성준수의 핸드폰으로 둘은 한참을 떠들었고 보다 못한 성준수가 이럴 거면 형 핸드폰으로 전화하시라고 한마디 하고서야 전화가 끊겼다. 36:54. 화면에 찍힌 숫자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사실 하루종일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거지 같던 기상호의 슛이 이제는 상대 팀이 의식할 정도로 봐줄 만한 슛이 되었고, 예선 탈락이 일상이던 지상고가 준우승을 했고, 박병찬의 무릎은 순조롭게 낫고 있다. 언제 또 이런 기분을 맛볼 수 있으려나. 벅찬 가슴에 기상호는 그날 밤 내내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매일 연락해도 되냐는 기상호의 말에 그래도 된다고 한 박병찬의 말은 진실이었다. 기상호가 남긴 톡에 박병찬은 늦을지언정 꼬박꼬박 답장을 보냈다. 오늘 뭘 먹었다며 종종 음식사진을 공유했고, 조형고와의 합동 훈련 사진을 보냈을 때는 박병찬에게 먼저 전화가 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상호 이제 슛 잘 넣더라? 헐 햄 제 경기 보셨어요? 봤지. 어때요? 잘하던데 너. 내가 재능 있다고 했잖아. 신나서 히히히 웃는 기상호에게 박병찬은 한마디 덧붙였다. 얼른 나 막으러 와야지 상호야. 그 말을 들은 기상호는 심쿵사 직전까지 갔다. 이 햄… 진짜 내한테 너무 해롭다. 그러나 그만큼 달콤했다. 의도치 않은 박병찬의 당근과 채찍으로 무럭무럭 자란 기상호는 그 무섭다는 고삼이 되었다.

 

내는 이제 준수햄이 이해가 된다. 입시가 이렇게 무서운 건지 처음 알았다. 그 말에 백 번 공감. 기상호는 K-고삼이 어디까지 독해질 수 있는지 절절히 깨달았다. 나는… 나는 독기 가득하다. 그나마 대회 우승이나 준우승, 하다못해 8강 이상 진출 기록이 있어서 다행이랄까. 우리 서울 가면 준수햄한테 진짜 거하게 대접하자. 일단 먼저 붙어야지. 죽어가는 지상고 농구부 고쓰리 집단 사이에서 기상호는 무얼 했냐면…, 준향대 입시 요강을 외우다시피 읽는 중이었다. 조건은 충족했다. 사실 성적으로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망설이는 이유는 첫째는 박병찬, 둘째도 박병찬, 셋째는 성준수였다.

 

박병찬때문에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기상호가 차이면 어떡하나 싶어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고백할 계획을 세웠는데 차이기라도 하면 앞으로 대학 어떻게 다니냐는 걱정이 이만저만을 넘어 삼만사만이었다. 게다가 상황 판단 빠른 기상호가 본인 주관 다 빼고 객관적으로 보면 차일 확률이 99.8퍼센트였다. 듣기에 박병찬은 예전에도 여자친구를 두어번 사귄 적이 있었으며 대학에 들어간 뒤 종종 고백을 받았다고 했다. 이상형도 들어보니까 애교 많고 성격 좋은 연하라고 했던가. 완전 이성애자 그 자체다. 기상호가 애교를 암만 부려도 이 덩치엔 귀엽지도 않을 텐데. 처음부터 글러 먹었다. 게다가 대학엔 예쁜 누나들이 얼마나 많을까. 어쩌면 이미 여친이 있을지도 모른다. 힝.

 

아, 셋째가 성준수인 이유는 걍 존나 무서워서다. 암만 구마 당했어도 그 성질머리가 어디 갈라고. 몇 번 감독님 만나러 내려온 성준수에게 욕 얻어 먹은 기억만 가득했다. 역시 준향대 말고 다른 곳으로 알아볼까.

 

고민이 한참 이어지던 때, 박병찬이 부산에 내려왔다. 혼자 여행을 하러 왔다면서.

 

 

 

“와, 상호야. 너 키 컸어?”

“쬐끔요.”

“너 젖살도 빠졌네? 진짜 내년에 어른 되는구나.”

 

아인데요. 전 내년에 열아홉인데. 어려 보이기 싫었던 기상호는 문장을 삼켰다.

믿기지 않지만 박병찬이 먼저 기상호를 불러냈다. 대회 끝났으니 주말에는 휴식이지 않냐며 자연스럽게 기상호를 불러낸 박병찬은 현지인 맛집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밥을 먹은 뒤에는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고 바다를 본 뒤에는 단 게 땡긴다며 카페로 이끌었다. 꼭 박병찬과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카페에 앉아서 조그맣고 달콤한 케이크를 사이에 두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실타래 풀듯이 주저리주저리 내뱉다 보니 대학 입시 얘기가 나왔다.

 

“너 대학 어디 쓰려고?

“고민이에요. 요건들은 대충 다 충족은 하는데 어디로 갈지를 모르겠어서.

으음, 가서 바로 주전으로 뛰고 싶어?

가능하다면요?

그럼 준향대는 어때? 너 같은 포지션이 딱 필요해서. 우리 팀이 공격은 괜찮은데 아무래도 수비가 좀 딸려가지고.

아… 준향대요.

왜? 싫어? 나도 있고… 준수도 있잖아.

 

그게 문제인데요. 툭 튀어나올 뻔한 말을 케이크와 함께 꿀꺽 삼킨 기상호가 그렇게 저랑 같이 뛰고 싶은 거냐며 능청을 떨었다. 박병찬은 그런 기상호를 물끄러미 보다가 흐릿하게 대답했다.

 

어. 난 너랑 같이 뛰면… 재밌을 것 같아. 좋을 것 같아.

 

바보같은 기상호는 재밌다는 말은 건너 뛰고 좋을 것 같다는 말에 홀려서 결국 준향대로 마음을 굳혔다. 에라이.

 

 

 

기상호가 영원히 이해 못할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왜 하루하루(not bigbang song)는 더럽게 늦게 가는데 일 년은 쏜살같이 지나가는지. 그저 삼백육십오 번 밤마다 눈을 감고 아침에 눈을 떴을 뿐인데 일 년이 지났다. 스물한살이 된 형들과 스무살이 된 정희찬 사이에서 열아홉 기상호는 억울함에 잉잉 울며 사이다를 마셨다. 모두가 알코올에 취해 뻗었을 때 분위기에 취한 기상호는 냅다 박병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전화는 곧바로 연결됐다.

어, 받았다.“

“상호 너 술 마셨어?”

“아니요?”

“뭘 아니야. 너 취했지.”

“아닌데요?”

“어엉, 그래.”

“햄. 저 준향대 가요.

응. 들었어. 나한테는 언제 말해주나 기다렸지.

“그래요?”

“응.”

“그렇구나….”

“상호 너 졸리지? 빨리 자야겠다.”

 

박병찬의 나긋한 목소리에 기상호의 주둥이가 잠금을 풀고 멋대로 주절거렸다.

 

“햄…. 저 햄 좋아해요. 진짜 좋아해요. 엄청 오래 좋아했어요. 킁, 진짜로 좋아해요.

 

전화 너머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에 취한 것도 모자라 덮쳐오기 시작하는 졸음에 기상호가 마지막으로 들은 문장이 뭐였냐면.

 

“나 내일 부산 갈게. 상호야. 내일 나 보고 다시 얘기해줘.”

 

 

 

좆됐다. 다시 말하지만 기상호는 알코올을 단 한 방울도 섭취하지 않았다. 간밤에 주절주절 내뱉은 고백과 박병찬의 마지막 말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진심 미쳤나! 기상호 니 개또라이가! 핸드폰 알림창엔 한 시간 반전에 기차에 탔다는 박병찬의 카톡이 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일단 샤워부터 후딱 끝낸 기상호는 일단 옷장에서 운동복이 아닌 옷을 주워 입었다. 부산역에 가는 버스에 올라탄 뒤에야 앞으로 마주할 현실을 자각했다. 이 햄은 진심 날 찰라고 부산까지 오는기가. 입안이 썼다.

 

부산역은 보통 언제나 사람이 많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던 기상호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박병찬을 한 번에 찾아냈다. 물론 박병찬이 남들보다 한 뼘씩 더 커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상호는 이목구비도 안 보이는 먼 거리에서도 박병찬을 알아봤으니까. 사랑의 위대함이 이런 걸까?

 

박병찬은 아무렇지 않게 느긋한 얼굴이었다. 상호 바로 발견, 오예. 이상한 말버릇도 여전하고. 기상호만 땀이 차는 손바닥을 수시로 바지에 닦아냈다. 박병찬이 잡았다는 숙소로 향하는 택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긴장으로 굳은 기상호와 그런 기상호에게 여유롭게 말을 거는 박병찬. 쭈그리고 앉은 기상호를 택시 기사가 힐끔힐끔 쳐다봤다. 아마 군기라도 잡히나, 그런 의심이었으리라. 아재요. 내는 차이러 가는 겁니다.

 

 

 

숙소는 깔끔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됐다는 말에 맞게 낙후된 곳이 없었다. 커튼을 열면 바다가 바로 보였다. 기상호는 그 숙소의 더블 침대 위에 앉아 손을 꼼지락 거리는 중이고.

“상호야. 왜 이렇게 긴장했어.”

“…햄. 죄송해요.”

“뭐가?”

“제가 햄 좋아해서 죄송해요.”

 

으응? 당황스럽다는 반응에 결국 기상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고백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정말 제대로, 제대로 고백하고 차이려고 했는데. 술도 안 마신 주제에 분위기에 취해서 그렇게 고백을 해버리다니. 얼마나 기분이 나빴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와. 소리도 못 내고 울기 시작한 기상호에 박병찬이 허둥지둥하다가 이내 품에 안았다.

 

“네가 왜 죄송해. 내가 미안하지.”

“햄이 왜요….”

“왜기는….”

 

내가 스무살 어린애 홀라당 데려가니까 그렇지. 그 말에 기상호가 더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흐엉, 헝, 킁, 햄, 햄 언제 여자친구, 흐어어어엉.”

“어엉? 아니, 상호야. 잠깐만, 잠깐만 진정해봐.”

“넵.”

“ 아니, 그렇게 갑자기 진정할… 아니다. 너 뭐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내가 말한 스무살은 너야.”

“넵? 어… 넵? 저요?”

“너 설마 내가 너 차러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거 아녜요?”

“너 머리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니구나. 상호야, 잘 들어. 나도 너 좋아해.”

“햄이… 저를요?”

“응.”

“그건… 저랑 뽀뽀!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좋아해 인가요.”

“뽀뽀랑 키스랑 더 한 것도 할 수 있는 좋아해야.”

“우와…. 와…. 우와!”

 

너 진짜…. 기가 찬다는 듯한 박병찬을 기상호가 끌어안았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짝사랑 삼 년에 고백을 받았다. 벅차오르는 가슴에 기상호가 다시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자 병찬이 손을 뻗어 천천히 상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다 문득 든 의문에 기상호가 질문했다.

 

“근데 햄 왜 스무살이에요?”

“어? 너가 스무살이니까?”

“아인데요. 저 빠른이라 아직 열아홉인데.”

“…어?”

 

이건 좀 예상 밖인데. 기상호가 앉은 더블 침대를 내려다본 병찬이 기상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기상호는 아직 모를 금욕 생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은 이유는 하나다.

 

아무래도 오타쿠는 고난과 역경에 불타오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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