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인AU
1999의 해, 일곱 번째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려고 그 전후의 기간에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으로 지배하려 하리라.
1999년 12월 31일.
20세기의 마지막 날, 정대만은 결심했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세기 최후의 경기를 하겠다고.
세기 끝의 버저비터
성탄절은 지났지만 거리엔 여전히 사람이 가득했다. 한 세기가 끝나고 새천년이 다가온다는 기대 때문인지, 다가오는 멸망에 마지막으로 떠들썩하게 인생을 사려는 건지,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리마다 사람이 우글거렸다. 아직 치우지 않은 트리의 조명이 반짝거리고, 가족과 연인 혹은 친구들끼리 모인 무리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대만은 우두커니 서있었다.
대만은 다가오는 새천년에 들뜨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천 년을 모두 살 것도 아닌데 뭣 하러 들뜨지? 정대만이 암만 오래 살아봤자 백 년이다. 고작 천년의 십 퍼센트. 그러니 새천년이니 21세기니 하는 것들에 기분이 들뜨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노 어쩌고 저쩌고의 예언.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도 안 되는 그 예언. 일부는 믿고, 대부분이 비웃는 그 예언이 좀 신경 쓰였다.
물론 정대만이 그 예언을 믿는 건 아니다. 대만은 생각보다 더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잊혀진 몇 년 전의 부상에 더 겁먹고 도망친 것이다. 객관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는 어렵다는 걸 본인이 먼저 알았기 때문에. 뭐, 진부하고 쪽팔린 과거 얘기는 굳이 할 필요 없고. 대만이 노 씨의 예언을 신경 쓰는 이유는 하나다.
어떠한 용기에는 핑계가 필요한 법이라서.
대만은 고개를 올려 거뭇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정대만의 20세기 마지막 경기를 시작할 때였다.
•
나흘 전에 송태섭이 귀국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기회를 얻어 미국 대학에 진학한 태섭이 간만에 돌아온 것이다. 원래 예정에 있던 귀국은 아니고 지구가 멸망한다는 여동생의 닦달에 돌아온 것이다. 걔는 그런 걸 진짜로 믿는 걸까요? 편지에 쓰인 문장의 글씨체마저 의문에 가득 차 있어서 대만은 그걸 보고 한참을 웃었다. 송태섭은 예나 지금이나 의외로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감정에 둔한 면이 있다. 바보야, 아라가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을 믿겠니. 그걸 핑계로 와서 얼굴 좀 보여달라는 거지. 대만은 본인이 해석한 문장을 전달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정대만도 같은 핑계를 댈 거라서.
사실 정대만이라는 남자는 핑계를 필요로 하는 부류랑은 거리가 멀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도망은 칠지언정 포기는 하지 않는 사람. 도망치더라도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나쁘게 말하면 단순하고 무식한 바보고, 좋게 말하면 뒤끝 없고 지랄 맞은 과거마저 인정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정대만의 유일한 뒤끝인 농구부 최후의 날은 잠깐 잊도록 하자. 사춘기라서 그랬다.
아, 사춘기. 더 이상 웬만한 일에는 회피하지 않는 정대만이 회피하고, 끝끝내 핑계가 필요해진 이유도 사춘기와 관련 있다.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에 정대만은 사랑이라는 폭풍을 맞이했다.
첫사랑은 열 살 때였나? 그랬던 것 같다. 옆집에 사는 중학생 누나였는데 어깨까지 곧게 뻗은 단발이 잘 어울렸다. 무릎에서 달랑거리는 치마와 학교 규정에 맞춰 신은 하얀 단화에 가슴이 뛰었더란다. 집 앞에서 마주칠 때면 상쾌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고 말씨가 상냥했던 누나. 그 때문인지 대만은 그 뒤로도 찰랑이는 단발머리와 하얀 단화를 보면 걸음을 멈추고는 했다. 양아치 생활을 할 때도 종종 여자와 놀고는 했지만 길을 걷다가 눈이 가는 건 화려함 보다는 청순 쪽이었다. 누군가가 대만더러 답지 않게 청순을 좋아한다며 놀려댔지만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고들 하지 않는가. 처음이란 건 원래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취향의 시작점이니까.
그러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대만은 작은 키에 하얀 피부, 말 그대로 첫사랑의 의인화 같은 스타일을 좋아했지 가만히만 있어도 섹시한 부류는 딱히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자. 더해서 같은 부 후배. 얹어서 농구부 주장. 이게 폭풍이 아니면 뭐가 폭풍이겠어.
송태섭과는 최악으로 시작했다. 물론, 이건 정대만 과실이 백 퍼센트다. 21세기의 솔로몬인 누구누구 티비에 보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정대만의 잘못이었다. 송태섭은 그저 열심히 농구를 했고 그래서 기대를 좀 받았을 뿐이다. 하필 그때 인생 최초의 회피 생활을 하고 있던 정대만 눈에 띈 게 태섭의 유일한 잘못이랄까. 정대만 평생의 죄. 대만은 죽는 순간에도 그날의 옥상을 잊지 않을 것이다. 주먹에 닿은 피부의 감각과 발로 걷어찬 농구화의 무게, 어느 순간 내리기 시작한 눈의 온도까지.
사과를 하는 것조차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고작 사과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용서 받는다면 대만 스스로가 본인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대만을 알 리가 없는데도 태섭은 돌아왔으면 됐다며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분노로 웃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진실된 웃음을 짓는 넌 제법 반짝거리는 구나. 실없이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과를 안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정대만이라는 사람의 대부분을 보여준 뒤에 하고 싶었다. 내 사과가 상황 모면을 위한 변명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라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고등학교 삼학년의 여름, 최강을 꺾은 뒤에야 대만은 체육관에 복귀했던 어느 날처럼 태섭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혹독한 연습 후에 집에 돌아가던 길이라 해는 이미 저물어 주위는 온통 까만 밤이었고, 풀벌레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날따라 골목엔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사위가 어둡고 조용한 가운데서 태섭은 뭐 하는 짓이냐며 당황했다.
"미안하다."
"뭐 하는 거예요. 얼른 일어나요!"
"내가 했던 짓이 없어지지 않는단 걸 알아. 그리고 넌 정말로 이미 용서했다는 것도 알아. 그래도 난 사과를 해야겠어. 사과도 하지 않고 용서 받는 건 성미에 안 맞아."
"진짜 바보 아니야? 갑자기 무슨... 알겠어요. 사과 받아줄게요. 그니까 일어나요. 지나가다가 누가 보면 어떡해요! 전 괜한 오해는 이제 질색이거든요?"
"일단 오늘은 알겠어."
"뭐가 일단 오늘은이에요. 전 사과 받았으니까 더 할 필요 없어요."
"알겠어. 근데 그건... 내 맘 아닌가?"
대만의 말이 끝나고 지은 태섭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인간 뭐 하는 인간이지, 라는 생각을 그대로 피부 근육에 옮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본 대만은 산왕과의 경기에서 이겼을 때보다 더 호탕하게 웃었다.
그 뒤로도 대만은 종종 뜬금없이 사과했다. 송태섭, 거기 포카리 좀 주고 미안하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래? 미안하다. 아무래도 원오원은 나의 승리구나, 미안하다. 태섭은 선배 오히려 그게 더 얄미운 거 아냐며 성질을 바락바락 냈지만 대만의 사과는 멈추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 일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술에 취하면 태섭에게 전화를 걸어(물론 국제 전화 요금은 대만이 부담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참 동안 하는 게 대만의 술버릇이다. 그 사이 태섭은 대만의 사과에 익숙해져 그래요, 하고 무시하거나 포기를 모른다더니 이런 거에도 모르는 거냐며 진저리를 쳤다.
대만의 조금은 일방적인 사과 이후, 기존의 3학년들이 은퇴했다. 이미 전국대회 전부터 정해져 있던 사실이었지만 한동안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었다. 특히 주장을 맡게 된 태섭은 더더욱. 정대만은 유일하게 남은 3학년이었기에 연상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을 했으나 딱히 소용은 없었다. 송태섭은 과거나 지금이나 혼자서도 잘 하는 애니까. 그래도 태섭의 약점인 점프슛을 연습해야겠으니 날 도우라는 부탁이 있었다. 정대만은 당연히 오케이를 외쳤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대만은 순조롭게 폭풍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객관적으로 송태섭이라는 인간을 보다 보면 애가 겉은 좀 껄렁해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고 아예 순하다는 건 아니지만, 양아치는 전혀 아니라는 거다. 생각보다 세심하고 눈치도 빠르다. 대만의 한계를 제일 먼저 눈치채는 것도 태섭이었다. 타고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눈이 좋았다. 분위기를 잘 읽는다고나 할까. 그런 부분이 특유의 여유와 단단한 줏대와 합쳐져서 묘하게 시선을 끌어당겼다.
가끔 태섭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곤 했는데 둘이 남아서 연습하던 어느 날, 대만이 대체 무얼 중얼거리는 거냐며 질문을 던지자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냥, 다짐? 그니까 그 다짐이 뭐냐고.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배 나한테 관심이 너무 많다는 말만 돌아왔다. 선배,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 없어요. 와, 그걸 너한테 듣다니, 제법 자존심 상하는데? 아놔, 원오원 하죠? 발라주마. 그날 대만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내 태섭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짐의 정체를 알게 된 건 겨울의 전국대회에서였다.
경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화장실에서 대만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누가 들어왔다는 사실도 모르는지 두 문장을 반복했는데 그게 태섭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대만은 그 자리를 조용히 빠져나와 문 앞을 지켰다. 누군가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다. 도망가고 싶어, 도망가지 않아. 이게 너의 다짐이구나. 넌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았구나. 대만은 문득 옥상의 장면을 떠올렸다. 잘게 떨리는 손을 감추고 태연하게 미소 짓던 송태섭. 입가에서 흐른 피를 닦아내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송태섭. 굴러가는 농구화를 쳐다보는 송태섭. 대만은 명치께가 조여오는 느낌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아, 오늘의 정대만도 최고다.
그날의 경기에서 송태섭은 끝까지 도망가지 않았고, 대만은 어느 누구보다 활약했다. 결국 그 경기로 추천 입학 제의도 받았으니 대만이 손해 본 건 무엇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내 체한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 그때 직감했던 것 같다. 아마 나는 이대로 평생을 송태섭이 얹힌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겨울 전국대회가 끝나고도 대만은 바로 은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섭이 이제 안 나와도 된다며 권유했지만 그걸 바로 대만이 거절했다. 지금 부원 자르는 겁니까 주장? 대만의 큰소리에 질린 얼굴을 한 태섭이 마음대로 하라며 자리를 피했다. 남겨진 대만은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태섭을 관찰했다.
정대만이 암만 바보라고 해도 구제 못할 똥멍청이는 아니다. 적어도 지금 본인이 자각한 감정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걸 숨겨야 한다는 것도 당연히 알았다. 세상에서 인정해주지 않아서? 부모님께 죄송해서?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죄 같아서? 모두 아니다. 그저 대만은 자신의 감정이 태섭에게 부담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태섭이라는 인간 자체를 잘 알고 있다고는 말 못해도 정대만의 송태섭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정대만은 태섭을 모른다. 그 애의 가족 관계나 가끔 섞이는 타지의 억양이 어디 것인지, 이따금 왼쪽 손목을 만지는 버릇은 언제부터 생겼는지, 한 번이라도 정대만을 원망한 적이 없는지.
그리고 정대만은 태섭을 안다. 슛이 안 들어 갈 때 입술을 비죽이는 모양, 정대만의 3점 슛이 들어갔을 때 어떤 표정을 하는지, 주말 연습이 끝나고 들른 식당에서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아, 나 널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어. 아직 지구 멸망설이 화제가 되지 않은 90년대의 어느 하루. 대만은 청순하지도 않고, 얌전하지도 않을 뿐더러 단화가 아닌 농구화를 신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폭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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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게 있어 살아온 인생을 백팔십도 바꿔버릴 사건이 일어나도 지구는 멈추지 않는다. 정대만이 송태섭을 향한 마음을 자각하거나 말거나 지구는 자전했다. 여전히 해가 저물고 뜨기를 반복했다. 그 말인즉슨, 하루 24시간이 멈추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영영 고등학교 3학년으로 살 수 없는 대만은 곧 농구부를 은퇴 했고 대학 진학에 앞서 혼자 머무를 방을 주말마다 보러 갔다. 이왕이면 주방과 방이 분리되어 있으면 좋겠는데. 채광이 좋고, 주변에 편의점이 있는 방. 대만의 침대 옆에 이불을 하나 더 깔아도 될 정도의 방 크기를 원했다. 무의식적으로 누군가가 머물기를 기대했다.
대만이 진학하는 대학은 어느 정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곳이다. 태섭도 듣자마자 오, 하고 제법 놀란 얼굴을 했었다. 다행히 원래 살던 곳과도 거리가 지나치게 멀지는 않았다. 버스로 한 시간 정도. 통학을 못 할 정도는 아니지만 연습을 늦게까지 하면 막차를 못 탈 것 같아서 방을 구하는 거였다. 치수의 대학과 준호의 대학 사이에 있어서 종종 만나서 밥을 먹기도 좋았다. 다만 하나, 북산과 거리가 좀 있었다. 직통으로 갈 수 있는 버스가 없어 환승을 해야 하는데 버스 시간표 아다리가 딱 들어맞지를 않아서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시간을 계산한 대만이 무슨 생각을 했냐면, 잘 하면 송태섭을 정대만 집에서 재우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걘 농구를 좋아하고, 대만은 농구를 잘하니까 가끔은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어떻게든 개수작을 부려서 막차 끊길 때까지 붙잡고 있기만 한다면, 그러면,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너무 음습하고 변태 같아서. 하지만 그럼에도 대만은 여전히 침대 옆에 이불을 깔 수 있을 정도의 방 크기를 원했고, 침대를 구매하기 직전까지도 더블 사이즈로 구매하는 것을 고민했다.
졸업식 날엔 농구부 모두가 모여 체육관에서 인사를 나눴다. 강백호는 덩치에 안 맞게 눈물을 찔끔 흘렸고, 한나는 시원섭섭한 얼굴을 했다. 태웅은 그날마저도 조금 졸았는데 그게 서태웅다웠다. 태섭은, 송태섭은, 웃고 있었다. 꼭 마지막 인사라도 하는 사람처럼 웃었다. 대만은 그게 충격이었다. 나만 당연히 우리가 계속 연락하고 만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적어도 송태섭 넌 나랑은 연락해야지. 사실 객기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태섭이 대만과 연락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보다 연락을 끊을 이유가 더 합리적이었으니까. 난 이미 네가 단단히 얹혀서 괜히 소화제를 먹곤 하는데 넌 그런 날 모르고, 아마 알아도 모르고 싶어 하겠지. 대만은 처음으로 과거의 정대만이 원망스러웠다. 저 조그만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만약 이미 지나온 과거에 널 만났다면, 우리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괜히 스스로에게 던졌다.
마지막으로 농구 해요.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교복을 입은 채로 실컷 땀을 뺐다. 대만은 아마 자기가 흘린 땀의 일부는 조금 더 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땀 99.8퍼센트에 눈물 0.02퍼센트 첨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만은 태섭의 집 주소를 갈취했다. 너 내가 편지 보내면 답장해, 알겠어? 대만의 억지에 태섭은 떨떠름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는 생각보다 자주 오갔다. 대학 진학을 일 년 앞둔 태섭은 대만이 다니는 대학의 훈련을 꽤 궁금해했고 대만은 그 궁금증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진학 상담에 가까운 내용이었으나 그걸로도 충분했다. 생각보다 어른스러운 글씨체를 볼 때면 심장이 지나치게 쿵쾅거려서 아주 조금이라도 간지러운 내용이 섞인다면 펑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대만 선배에게, 송태섭으로부터. 글자를 각막에 새길 것처럼 반복해서 읽었다.
여름 전국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엔 태섭이 대만의 자취방에 머무르기도 했다. 아직도 약한 점프슛 극복을 위해 특훈을 받으러 온 것이다. 대만의 대학을 구경시켜주고 훈련을 보여준 뒤 근처 밥집에서 밥을 먹고 원오원을 했다. 이거 살짝 데이트 같을지도? 물론 데이트의 디귿도 아니라는 사실은 대만이 제일 잘 알았다.
몇 달 만에 본 태섭은 아주 조금 자랐고, 약간 더 단단해져 있었다. 올해 일학년도 많이 들어왔고, 백호 자식도 제법 농구 선수 같다니까요. 치수 선배가 보면 울어버릴지도? 그동안 모아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태섭의 입술을 보며 대만은 지금 뽀뽀하면 앞니가 아니라 어금니가 나가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몰래 늦은 밤 잠든 태섭을 한참 동안 훔쳐봤다. 해가 어스름 떠오는 때까지 계속, 계속. 오후에 태섭이 돌아가고 대만은 태섭의 체취가 남은 이불을 한참 동안 껴안았다.
태섭이 없는 일상은 지나치게 느리게 지나가다가도 순식간에 계절을 갈아입었다. 북산은 여름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태섭은 은퇴를 할지 말지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며 선배가 정해보라며 장난 섞인 편지를 보냈다. 대만은 농구를 사랑한다. 송태섭을 사랑한다. 농구를 하는 태섭을 사랑한다. 생각을 정리한 대만은 진심을 섞은 문장을 적었다. 어차피 넌 네 맘대로 하겠지만 내 의견을 들어주겠다니 말해주마. 은퇴하지 마. 난 네 농구를 제법 많이 좋아하거든. 태섭의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선배 생각보다 부끄러운 말을 잘 하네요. 알겠어요. 근데요. 내가 미국에 가면 어떨 것 같아요?
전국대회를 보고 장학재단에서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고, 태섭의 편지는 웬일로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아메리카, 유에스에이, 미국. 대만은 수업 시간에 봤던 세계지도를 떠올렸다. 가까운가? 먼가? 비행기 티켓 가격이 무척 비싸다고 했던 것 같다. 연필 끝을 책상에 두드리던 대만이 답장이 적힌 편지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가지 마, 라고는 아마 죽어도 말 못 해. 대만이 태섭을 망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그리고 태섭과 대만은 가지 말라고 말할 정도의 무언가가 아니었다. 사실 우리는 고작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지. 어쩌면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고. 생각을 정리한 대만이 새 편지지에 연필 끝을 갖다 댔다. 지나치게 들어간 힘에 연필심이 부러지고, 대만은 한숨을 내뱉었다. 진심은,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 내가 너의 무언가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른세수를 한 대만이 연필을 깎고 다시 답장을 적는다.
송태섭, 뭘 망설이는 거야! 너 남의 말에 휘둘리는 겁쟁이가 아니잖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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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가지 않는 용감한 송태섭은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직 가족 빼고 아무도 몰라요. 먼저 알려주는 거예요. 편지가 원망스럽던 건 처음이었다. 차라리 가기 전날 알려주지. 대만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 뭔지를 이젠 알 것 같았다. 아마 대학까지는 거기에 있을 것 같다는 말에는 송태섭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의 정대만 나이를 헤아렸다. 태섭이 돌아온다고 결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애초에 송태섭은 정대만의 마음을 모른다. 대만도, 아직은 용기가 없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가 포기하려면 거절을 당해야 하는데, 거절 당할 생각을 하면 몹시 아득해져서 대만은 차마 고백할 수가 없다. 난 무너지면 안 돼. 아직 승승장구해야 된단 말이지. 그나마 이런 변명거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영원한 비밀은 없기에 태섭은 미국으로 떠나기 이 주 전에 모두에게 알렸다. 졸업식도 하지 않고 떠나는 일정이었다. 소식에 이제는 2학년이 된 북산의 콤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다음엔 나라며 투지를 불태웠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걱정 섞인 잔소리를 퍼부었다. 여권 꼭 들고 다니고, 거기서는 싸우지 마. 시간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기로 한 장소에는 대부분이 나와 태섭의 인망에 감탄했다. 허투루 감투를 쓴 건 아니었나 보군. 자리는 생각보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고 마지막까지 남은 건 대만과 태섭이었다.
"이렇게 둘이 가니까 작년 생각 나네요."
"그러게. 그땐 네가 미국에 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지."
"나라고 했겠어요."
밤하늘 사이로 뽀얀 입김이 흩어졌다. 해가 바뀌기 전에 떠나는 거라 대부분이 미성년인 탓에 건전하게 파한 자리였지만 찬바람 때문인지 태섭의 볼이 붉었다. 그러다 문득 대만은 깨닫는다. 나, 너의 스무살을 못 봐. 스물한 살의 너는 볼 수 있을까? 몹시, 억울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바로 갈무리했는데도 그 짧은 새에 치고 올라온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태섭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래, 넌 눈치가 빨랐지.
"선배. 혹시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없어. 아아, 너 나한테 잘 가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거구나. 잘 가, 송태섭. 너라면 잘 하겠지."
"음, 그건 아닌데요. 그리고 이왕이면 잘 다녀오라고 말해줄래요?"
미안하지만 난 가지 말라고 하고 싶어, 아직도. 입 안에 고인 말을 씹어 삼킨 대만이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잘 다녀와.
송태섭이 없어도 한국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간다. 길거리에 흐르는 노래들은 주기적으로 바뀌었고, 뉴스엔 지루하고 진부한 소식들 사이에 놀라운 일들이 종종 섞여들었다. 놀랍게도 태섭은 미국에서 편지를 보냈다. 전화는 너무 비싸거든요. 그래서 대만이 전화를 걸었다. 인생사 모르는 거라며 첨부한 번호에 전화를 걸었을 때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심장께를 내내 붙잡고 있었다. 선배, 이거 진짜 비싼 거 알아요? 당황 섞인 목소리에 대만은 와하학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 그래서 그게 뭐 어쩌라고? 대만의 대답에 태섭은 잠깐 망설이다가 진짜 선배는 선배다워서 좋다는 말을 수화기 너머에서 전달했다.
태섭은 자주 돌아오지 못했다. IMF가 터지면서 환율이 급등한 탓에 비행기표를 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때문에 태섭은 미국으로 넘어가자마자 이년을 꼬박 그곳에 머물렀다. 전 괜찮은데 엄마랑 아라가 걱정이에요. 그 문장 하나에 대만은 주기적으로 송태섭의 본가에 방문했다.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를 갈고, 대만이 안 신는 신발을 현관에 두고, 두 사람이 집을 비울 때면 대신 집을 지켰다. 태섭은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나중에 한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 돌아온 태섭이 대만이 한 일을 전해 듣고 날이 밝자마자 대만을 찾아왔다. 오묘한 얼굴로 고맙다고 말하는 태섭을 보고 대만은 그저, 쟬 그냥 세게 껴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도 종종 대만은 태섭의 본가에 방문했고, 더럽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욕 나오게 비싼 국제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 대만은 실업팀에 입단했다. 오랫동안 살던 자취방을 벗어나 지은 지 칠 년 정도 된 아파트를 매입했다. 이젠 가족 모임에 얼굴을 비출 때면 슬슬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준호녀석 내년에 결혼한다고 했던가.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어, 1999년이 밝았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다.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정대만은 예언을 믿지 않는다. 노 어쩌고고 나발이고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종종 뉴스에서는 지구의 종말을 떠들었다. 죽기 전에 하고 싶던 걸 하겠다며 무언가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았다. 예언의 칠월이 지났고, 대만은 여전히 태섭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직 쨍쨍한 태양 아래서 대만은 문득 어떤 것을 깨닫는다.
드디어 대만의 용기에 필요한 핑곗거리가 생겼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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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저 한국이에요. 전화선 너머 들리는 목소리에 대만은 재빨리 12월 31일의 예정을 물었다.
"어, 따로 예정은 없는데 왜요?"
"저녁에 나와. 밥 먹자."
"저녁? 선배, 그, 애인, 없어요? 올해의 마지막 날에는 같이 있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애인 없어. 그니까 네가 위로 좀 해줘."
"아니, 뭐... 나로 괜찮다면..."
"그럼 여섯 시에 역 앞으로 나와. 알겠지? 여섯 시, 역 앞이다."
"알겠어요. 그럼... 그때 봐요."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대만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일단은 미용실! 그리고 백화점! 12월 31일의 정대만은 인생을 통틀어서 최고여야 한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대만의 꽁무니에 설렘이 따라붙었다.
농구 코트 안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당장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봐라. 북산이 산왕을 꺾을 거라고 감히 누가 예상했던가. 버저비터는 여전히 놀랍지만 꽤 일어나는 일이었다. 무릎에 부상을 입은 대만이 이토록 오래 농구 선수로 살아 남을 거라고는 대만 본인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조그만 태섭이 실력을 인정 받아 미국으로 갈 거라곤 아무도 몰랐고. 그래서 농구가 재밌는 거다. 도통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이 안 되니까.
그리고 대만은 지금 20세기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다. 컴컴해진 하늘 아래서 조명은 더더욱 반짝이며 빛난다. 공기는 한없이 차가워 대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멋을 부리느라 차려입은 바지 사이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둘러맨 목도리에 얼굴을 처박고 있으면 뒤에서 누군가가 툭툭 대만을 두드렸다. 태섭이다.
여전히 굽실한 머리를 왁스로 넘긴 태섭이 특유의 짝짝이 눈썹을 사용해 웃으며 대만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선이라도 보고 왔어요? 뭘 이렇게 차려입었대."
"선은 무슨. 춥다. 배고프지?"
"조금요."
"내가 예약한 식당 있어. 가자."
걸음을 옮기는 대만 옆으로 태섭이 섰다. 나란히 움직이는 발에 괜히 웃음이 튀어나온다. 대만보다 한마디 정도 작은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가족들은?"
"선배 만난다고 하니까 얼른 가라고 하던데요."
"그래?"
"응. 아마 뭐..."
"아마 뭐?"
"아니에요. 얼른 가요."
찜찜하게 끝난 말에 더 캐물을까 싶다가도 붉게 물든 태섭의 귀 끝에 대만이 걸음을 재촉했다. 애 감기 들리면 안 되니까.
미리 예약한 식당은 성공적이었다. 두 시간 코스로 나오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주변에 커플이 많아 조금 민망하긴 했다만 음식이 맛있었다. 태섭도 이렇게 맛있는 건 오랜만에 먹는다면서 그릇을 싹싹 비웠다. 디저트 카페와도 연계된 곳이라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며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더니 어느새 밤이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려는 건지 여전히 사람들로 거리가 꽉 차 있었다. 인파 사이에 휩쓸려 떠다니듯 걷는데 태섭이 대만의 손목을 톡 치고는 한쪽을 가리켰다. 선배, 저 사람들 뽀뽀해요.
"우와, 열정적이네."
"근데 미국에서는 저런 거 흔하더라고요. 길에서 뽀뽀하고, 그런 거."
"너도 한 거 아니야?"
"아니네요. 절 뭘로 보고."
대만이 몰래 안도했다. 적어도 길에서 뽀뽀할 상대는 없었다는 거지. 흘깃 손목에 한 시계를 보니 얼마 안 있으면 새해였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외침이 종종 들렸다. 그래요. 어쩌면 적어도 정대만의 지구는 멸망할지도 모르겠네요.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에 대만과 태섭이 좁은 골목 사이로 몸을 피했다. 두 사람이 겨우 서 있을 정도였는데 아무도 없어 고요했다. 당장 몇 발자국만 나가면 나오는 세상과는 묘하게 분리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제 세기 최후의 경기가 시작된다.
"송태섭. 넌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 믿어?"
"갑자기 뭔 소리래. 안 믿어요. 지구가 하루아침에 망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 난 믿거든."
"네? 선배가요?"
"어. 그리고 지구가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는 거, 그거 가능하거든. 왜냐고? 내 지구가 갑자기 멸망한 적이 있어서 그래. 사실 많아. 일단 무릎 부상 입었을 때, 그 뒤로 한 번 더 부상이 도졌을 때. 이미 이 정대만의 지구는 두 번 망했지. 그리고 세 번째."
"... 세 번째요."
"세 번째 멸망 사유는, 사유는. 내가, 송태섭 널 좋아해서야. 내가 널 사랑해서 내 지구가 망했어. 널 괴롭게 만든 내가 감히 널 사랑하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멸망해버렸다고."
"어... 어...? 그니까, 날 좋아, 좋아..."
"널 좋아해. 널 사랑해. 지구가 정말로 멸망하기 전에 말하고 싶었어."
끝났다. 지금 이 상태라면 정말로 지구가 일 초 만에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송태섭과 한날한시, 같은 장소에서 죽는 것도 제법 괜찮을지도.
대만은 제 앞에선 태섭을 내려다본다. 당황한 건지 황당한 건지 모를 표정의 송태섭. 여전히 귀 끝이 붉은, 송태섭. 손을 잘게 떠는 송태섭...
어라?
"나를, 좋아한다구요... 선배가, 나를."
어라...?
골목 너머에선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는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들린다.
오, 사, 삼, 이, 일!
해피 뉴 이어!
결국 노 씨의 예언은 틀렸다. 지구는 멸망하지 않고 무사히 새천년, 21세기를 맞이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행복을 노래하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그 사이, 여전히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은 골목에서, 정대만은 본인의 손을 떠난 공이 림을 통과하는 소리를 듣는다.
세기 끝의 버저비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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